교회설립


영광교회 전신인 성일교회 설립자 주경선은 1903년 2월 27일 경남 거창에서 아버지 주재남씨와 어머니 김씨 사이에서 큰 딸로 태어났다.
13세 되던 해 호주 선교사 미스 서호성이 설립한 거창여자사립학교에 입학하여 17세때 졸업을 했는데,
처음 입학당시 7명의 학생이 입학했으나 주경선 혼자 졸업했다.
졸업 후 서홍성 선교사의 추천으로 서울 동대문 병원 간호원 양성소에 입학하여 4년 뒤 졸업을 하고,
함경남도 함흥 제례병원에서 4년간 근무를 하다가 1931년 4월 호주 선교사 미스덕순씨가 고향인 경남 거창에 설립한 탁아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탁아소 근무중 3.1독립만세 운동으로 3년간 옥고를 치룬 리윤의 장로와 결혼하여 전북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에 거주하게 된다.
그러나 신사참배운동에 반대하던 남편 리윤의 장로는 다시금 경찰에 붙들려 옥고를 치루게 되었고,
1945년 봄에 풀려 났으나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휴우증으로 1949년 5월 25일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혼 12년만에 남편과 사별한 주경선을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욱이 6.25동란을 맞으면서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6.25동란이 끝날 무렵 1954년 남원동북교회의 전도사로 청빙을 받아 주의 일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남원경찰서 경찰관으로 있던 김창호 순경이 찾아와 지금 길거리에 6.25동란으로 짐과 가산을 불태우고 가족을 잃고
걸식하며 다리밑에서 자고 있는 불쌍한 노인들이 많으니 그들을 위하여 양로원을 설립 하자고 하는 간청을 받고
1957년 1월 13일 20명의 노인들을 모아 남원읍 향교리에 양로원을 설립하게 되었으니 그 양로원이 바로 성일 양로원이었다.
양로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불쌍한 노인들의 영혼을 구원 하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노인들의 침실에서 기도회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기도회를 시작한지 9개월만인 1957년 10월 3일 양로원 뒤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전북노회의 허락을 받아 설립예배를 드리고
성일교회 간판을 걸게 되었으며 초대 교역자는 안심의 전도사로 모시게 되었다.
13세 되던 해 호주 선교사 미스 서호성이 설립한 거창여자사립학교에 입학하여 17세때 졸업을 했는데,
처음 입학당시 7명의 학생이 입학했으나 주경선 혼자 졸업했다.
졸업 후 서홍성 선교사의 추천으로 서울 동대문 병원 간호원 양성소에 입학하여 4년 뒤 졸업을 하고,
함경남도 함흥 제례병원에서 4년간 근무를 하다가 1931년 4월 호주 선교사 미스덕순씨가 고향인 경남 거창에 설립한 탁아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탁아소 근무중 3.1독립만세 운동으로 3년간 옥고를 치룬 리윤의 장로와 결혼하여 전북 임실군 둔남면 오수리에 거주하게 된다.
그러나 신사참배운동에 반대하던 남편 리윤의 장로는 다시금 경찰에 붙들려 옥고를 치루게 되었고,
1945년 봄에 풀려 났으나 감옥에서 당한 고문의 휴우증으로 1949년 5월 25일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혼 12년만에 남편과 사별한 주경선을 어려운 생활고에 시달리게 되었다. 더욱이 6.25동란을 맞으면서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6.25동란이 끝날 무렵 1954년 남원동북교회의 전도사로 청빙을 받아 주의 일에 전념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남원경찰서 경찰관으로 있던 김창호 순경이 찾아와 지금 길거리에 6.25동란으로 짐과 가산을 불태우고 가족을 잃고
걸식하며 다리밑에서 자고 있는 불쌍한 노인들이 많으니 그들을 위하여 양로원을 설립 하자고 하는 간청을 받고
1957년 1월 13일 20명의 노인들을 모아 남원읍 향교리에 양로원을 설립하게 되었으니 그 양로원이 바로 성일 양로원이었다.
양로원 원장으로 일하면서 불쌍한 노인들의 영혼을 구원 하기 위해, 아침 저녁으로 노인들의 침실에서 기도회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기도회를 시작한지 9개월만인 1957년 10월 3일 양로원 뒤에 예배처소를 마련하고 전북노회의 허락을 받아 설립예배를 드리고
성일교회 간판을 걸게 되었으며 초대 교역자는 안심의 전도사로 모시게 되었다.






